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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자하 하디드

by 건축사 손정민 2011. 8. 17.

Zaha Hadid: Kick and Rush

 

자하 하디드

 


자하 하디드, 동대문 디자인 파크 & 플라자 렌더링

도시-문화 마케팅(City Marketing)

199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도시-문화 마케팅 붐이 일면서 렘 쿨하스, 프랭크 게리 등 스타급 건축가들의 건물이 도시마다 문화적 상징물처럼 들어서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빌바오 시가 프랭크 게리의 구겐하임 미술관 건립으로 탄광 도시의 이미지를 벗고 탈근대 문화도시로의 도약에 성공하면서 도시-문화 마케팅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두바이, 베이징, 상하이 등 신흥 경제 중심 도시들을 중심으로 소위 스타키텍트(starchitect)들의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해왔다. 한국도 도시 간 경쟁이 가열되고 저마다 문화 도시로의 도약을 꿈꾸며,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디자인을 앞세운 랜드마크를 도시에 들이고 있다. 대표적인 스타키텍트인 프랭크 게리와 (동대문 디자인 파크 & 프라자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의 디자인은 자유로운 곡선적 형상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특히 문화 관련 건축물 설계로 폭넓은 시장성을 확보하고 있는데, 하디드 건축 사무소의 경우 현재 진행중인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만 50건이 넘을 정도로 시장 장악력은 상상 그 이상이다.

게리와 하디드의 디자인은 얼핏 보면 유사한 듯 하면서도 확연히 구분된다. 차이는 두 디자이너의 작업 과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게리의 경우 빳빳한 조각판들을 이리저리 배치해가며 직관적으로 형태를 구성하는 방식에서 출발하는데 반해, 하디드는 절제되고 진지한 평면 드로잉에서 출발하여 이를 3차원 공간에 투사시키는 즉 2D와 3D를 오가는 실험적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두 디자인은 실제 건물의 구축에서도 차이를 보이는데, 게리 건축의 곡면 외관은 기하학적 틀 구조에 의해 떠받쳐져 내-외부 구조가 불이치하는 반면, 하디드의 건물은 별도의 지지체 없이 ‘구조가 곧 벽면이자 외관’이 되는 내-외부 일체성을 띠고 있다. 특히 게리와 달리 하디드의 건축은 오가닉 디자인으로 많이 불리는데, 이는 건물 전체를 타고 흐르는 곡선적 형상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흐름이 유기체의 형태와 닮은 데서 기인한다.

 

1960-70년대 러시아 아방가르드 붐(The Revival of Russian Avant-garde in 1960s-70s)

하디드의 오가닉 건축은 사실 그녀의 스승이었던 렘 콜하스나 다른 동시대 디자이너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형태이다, 이러한 오가닉 구조와 형태, 그리고 이면에 떠받치고 있는 개념에 도달하기까지의 실험을 추적해 보면, 1960-70년대 영국 AA (Architectural Association) 건축학교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조명되었던 20세기 초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디자인 운동과의 연관성이 확인된다. 60-70년대 런던 미술/디자인계의 러시아 붐은 러시아 출신의 카밀라 그레이(Camilla Gray)의 저서 <위대한 실험: 러시아 미술 1863-1922>의 영어본이 출간된 1962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 1971년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혁명과 예술: 1917년 이후 소비에트 미술과 디자인(*디렉터: 노르베르트 린턴 Norbert Lynton)을 기점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제 하에 더 이상의 문제 제기를 할 수 없던 결정론적 근대 디자인으로부터의 탈출을 모색하던 디자이너들에게 혁명기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디자인의 사회 참여적, 비판적 기능에 대한 회복을 모색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돌파구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대를 형성했으나 ‘어떻게’라는 실천적 방안에 있어서는 의견이 엇갈릴 수 밖에 없었다. 일부 디자이너들은 런던으로 몰려드는 해외 이민자들의 주택 문제를 겨냥한 집합주택 디자인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일부는 새로운 컴퓨터 테크놀로지에 장밋빛 기대를 거는 기술적 실험으로 해결을 모색했다. 그 가운데 하디드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특히 말레비치로 대표되는 절대주의(Suprematism) 미술가/디자이너들의 형식 실험을 이으며, 이것을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활용하여) 사회적 비평 논의로 확장시켜나가는 방식을 채택한다. 즉, 형식실험과 기술실험, 참여적 디자인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정교하게 연결시키는 테크니컬한 전략이다.

 

2D + 3D 합체: 공간의 시각화(2D + 3D Integration: Visualization of Space)

하디드와 러시아 아방가르드와(특히, 절대주의 작가 말레비치)의 연관성은 2010년 취리히에서 열린 ‘자하 하디드와 절대주의(Zaha Hadid and Suprematism)’ 전시를 통해 공식화되었지만, 그 영향 관계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정신을 수용적으로 이어가는 것인지 비판적으로 딛고 일어서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모소하다. 사실 절대주의와 구성주의가 표방했던 실험의 목적이나 방법에도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하디드가 어떤 점에서 두 계열을 동시에 끌어안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하디드와 말레비치와의 인연은 AA 졸업작품 ‘말레비치의 텍토닉(Malevich’s Tektonik)’ (1976-77)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디드의 형식 실험은 한마디로 말레비치의 ‘텍토닉(tektonik)’ 개념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는데, 텍토닉이란 1922년 말레비치가 사회주의 이상에 맞는 타운 플랜 프로젝트를 이끌 당시, 건축의 제로 컨디션(Zero of Architecture, 건축에서 기능을 제외하면 과연 무엇이 남는가라는 본질에 대한 고민)을 탐구하면서 도출된 개념이다. 그런데 하디드는 텍토닉 개념을 이어가면서 의아하게도 이를 삼차원 모형이 아닌 평면 드로잉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개념상으로는 분명 건축의 텍토닉에 관한 것인데 외화된 형상은 평면 작업, 그것도 말레비치의 평면 작업과 거의 흡사하다 보니, 이차원 평면 개념과 삼차원 공간 개념 사이에서 보는 이들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